용인시 도서관 소식지<도서관 세상> 기고

쉰이 넘어 독서 재미를 알았다
강원국 (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독서 취향이랄 게 딱히 없다. 독서량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느 잡지에서 ‘작가의 서재’ 인터뷰 요청이 왔을 때 난감했다. 서재를 사진에 담자고 하는데 나는 서재가 없다. 대학 다닐 때 모은 3천여 권을 2년 전 충동적으로 팔았다. 트럭 스피커에서 ‘헌책 삽니다’란 소리를 듣고 단돈 백만 원에 모두 처분했다. 내가 책의 노예가 되는 것 같은 느낌에서 그랬다. 팔고 나서 후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령의 글쓰기》를 써야 했기 때문이다.

명색이 ‘저자’가 되고부터 책에 관한 인터뷰를 할 일이 적잖다. 글쓰기 책을 썼기에 더욱 그러하다. 가장 난감한 질문은 감명 깊게 읽은 책이다. 학교 들어가기 전 읽은 책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엄마 찾아 삼만리》다. 혼자 있을 때는 늘 이 책을 읽었다. 읽고 또 읽어 책이 너덜거리고, 내용을 모두 외울 정도였다. 나이 먹어서도 불현듯 이 책이 생각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읽은 또 한 권. 제목은 기억에 없다. 독후감, 일기, 편지 등을 모아놓은 책이었다. 우수 글 모음집 같은 책이었다. 그것도 닳도록 읽었다. 아마도 초중고 시절 내가 쓴 모든 글은 이 책의 영향 아래 있지 않았나 싶다. 고마운 책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읽은 독서가이자 작가 알베르토 망구엘. 자신의 모국 아르헨티나 출신 대작가 보르헤스가 시력을 잃었을 때 책을 읽어준 것으로 유명한 바로 그분. 그는 《독서의 역사》란 책에서 독서와 삶의 유형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순례자, 은둔자, 책벌레. 순례자는 두루 섭렵하는 스타일이고, 은둔자는 파묻혀 냅다 파는 스타일이며, 책벌레는 주마간산 식으로 책 권수만 늘리는 스타일이다.
나는 책벌레 스타일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진득하게 글을 읽지 못한다.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읽지 못한다.​ 읽고 싶은 내용을 찾아 읽거나, 읽다가 건너뛰거나 둘 중 하나다. 심지어 목차 독서를 즐긴다. 온라인 서점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의 목차만 본다. 그러다가 내용이 궁금하면 책을 사서 읽는다. 소설이나 시를 읽으며 감동을 느낀 지는 오래됐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소설과 시가 주는 감흥은 노스탤지어가 되어간다. 가끔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 한다. 자극이 필요한 때는 자기계발서나 관심 있는 사람이 쓴 에세이를 읽는다. 글쓰기 강의나 책 쓰는 데 도움이 되는 전문서는 생계를 위해 읽는다.

그렇다고 독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서와 글쓰기는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독’이 글쓰기 첫 번째 요건이라는 구양수 선생의 말에 동의하진 않지만 말이다. 내 경험으로 글쓰기에 도움 되는 몇 가지 독서법을 소개한다.
먼저, 고전 읽기다. 마크 트웨인은 고전을 ‘누구나 한 번쯤 읽기를 바라지만, 사실은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는 책’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렇다. 평소 이런 책을 읽지 않았다. 어렵고 딱딱하고 재미없어서 안 읽었다. 과연 나만 그럴까. 고전을 읽으면 고전한다고 했다. 그리스어나 라틴어, 중국 옛말로 쓰인 고전을 영어나 일어로 번역해서, 다시 그것을 우리말로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에 잘 읽히지 않는다. 고전은 요즘 번역서같이 의역할 수도 없고, 한 단어, 한 구절을 본래 뜻에 충실하게 직역해야 한다. 그러니 쉽게 읽히지 않는다. 하지만 아들에겐 전공이나 영어 공부는 안 해도 좋으니 동서양 고전 100권 읽기에 도전해보라고 했다. 실행에 옮길 것이라고 기대하고 한 소리는 아니다. 책을 읽으라는 자극을 주기 위해서다.
실제로 우리나라 국민 중에 고전 100권을 읽은 사람이 0.01%나 될까? 미국은 1920년대 컬럼비아대학에서 고전 읽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대학 3, 4학년 2년 동안 고전만 읽는 과정을 개설했다. 지금은 세인트존대학을 비롯해 많은 대학이 학부 4년 동안 고전 100권을 읽는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EBS 프로그램 내용이다. 내 기억으로 우리나라도 어렴풋이 그런 시도를 했다. 초등학교 다닐 적에 ‘고전읽기반’이라는 게 있었다. 선생님이 공부깨나 하는 친구들을 모아 구성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같은 책을 열심히 읽었다. 다른 학교와 경쟁해야 했기 때문이다. 교육청 주관으로 시험도 봤다. 미국이 토론 중심으로 고전 읽기를 한 데 반해, 우리는 외워서 시험을 봤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있었다. 공부를 잘했다는 얘기다.

고전을 소개하는 칼럼을 쓸 일이 있어 읽은 적이 있다. 읽은 책이 열권도 되지 않았지만 읽고 느낀 게 있다. ‘역시 고전은 고전이구나.’ ‘왜 고전, 고전하는 구나.’ ‘글 쓰는 데 도움이 많이 되겠구나.’ 하는 점이다. 첫째, 생각나게 하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오래된 책이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주는 시사가 있다. 쓸거리를 생각나게 한다. 둘째, 응용할 수 있는 원리가 담겨 있다. 다른 책에 나온 걸 가져다 쓰면 표절이 되지만, 원리를 갖고 응용해서 글을 쓰면 시비 걸 사람이 없다. 셋째, 누구나 인정하고 널리 회자되는 명문이 있다. 인용을 하더라도 고전에서 하면 폼이 난다.
하지만 역시 이해 못할 대목이 많았다. 읽으면서 몇 번을 갈등했다. 읽는 것을 멈추고 검색으로 해결할까? 연재를 포기할까?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런 마음이 들수록 호승심이 발동했다. 책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딱딱한 것을 씹어야 이가 튼튼해진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읽으면서 두 가지를 경험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억지로라도 읽으니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알 것 같은 이 기분이 매우 좋다는 점이다. 나만 알아차린 것 같은, 니체와 대화하는 듯한 뿌듯함! 고전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 이런 것이리라.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이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었다. 역시 어렵다. 그러나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전은 서로 통하는 바가 있구나. 고전을 관통하는 에너지 같은 것, 고전만이 주는 묵직한 울림 같은 것이 있구나. 어렵더라도 고전 세 권만 읽어보길 권한다. 많이 읽으면 좋겠지만 세 권만 정독해도 서른 권 읽은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고전의 프랙탈을 확인할 수 있다. 글쓰기가 달라질 수 있다.

특정 작가가 쓴 작품을 모두 읽는, 이른바 전작주의 독서도 좋은 방법이다. ‘전작주의’는 헌책 수집가 조희봉 씨가 만든 개념이다. 어느 작가를 좋아해서 처음부터 작정하고 읽을 수도 있지만, 한두 권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 그 작가의 작품을 모두 읽게 된다. 여러 작가가 쓴 삼국지를 모조리 읽는 사람도 있다. 일종의 오타쿠가 되는 것이다. 만화는 대부분 이렇게 읽는다. 영화도 그렇게 보는 경우가 많다. 이를 확장하면 ‘테마주의’가 생길 수도 있다. 특정 테마나 주제에 관한 책을 모두 읽는 것이다. 습관이면 습관, 몰입이면 몰입, 요리, 등산, 여행 등에 관한 책을 찾아서 다 읽는 것이다. 처음 읽은 책에서 소개한 책을 따라가는 방법도 있고, 참고문헌에 나와 있는 책을 읽는 방법도 있다.
전작주의 독서는 얻는 게 많다. 어떤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신작에 이르기까지 모두 섭렵하게 되면 그 작가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마치 중·고교 다닐 적, 문제집 여러 권을 풀었을 때 그 과목 전체가 한 장의 그림으로 다가오는 경험이다. 그래서 문학비평가 중에는 작가보다 그 작가를 더 잘 아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렇게 한 사람을 제대로 알면, 그 사람을 통해 알게 된 이치로 다른 작품까지도 관통할 수 있게 된다. 소설가 한 사람에 정통하면 소설 세계 전체가 이해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비단 문학만이 아닐 것이다. 니체의 책을 모두 읽게 되면 철학이 무엇인지 환하게 보이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는 희열을 맛볼 수도 있다.

전작주의는 글쓰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칼럼리스트 글을 모을 수 있는 데까지 수집해서 모두 읽어보는 것이다. 그리하면 그 사람같이 쓰게 될 확률이 높다. 전작주의의 대상이 되는 건 글 쓰는 사람에겐 꿈같은 일이다. 내 책을, 내 글을 누군가 모두 읽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전작주의는 글 쓰는 사람, 읽는 사람 모두에게 의미 있는 접근법이다. 하지만 조심할 것도 있다. 군대 있을 때 이문열에 심취해서 그것이 소설의 전부인 줄 잘못 안 적이 있다. 전작주의의 함정이다.

쉰이 넘어 책에 빠졌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뒤늦게 책 읽는 재미를 알고 푹 빠졌다. 이런 멋진 신세계가 있나 싶다. 독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글을 잘 쓰기 위해서다. 나의 독해법을 잠깐 소개해본다. ▲1단계로 목차, 서문, 저자 후기부터 읽는다. 2단계로 궁금하고 읽고 싶은 부분을 찾아 읽는다. 3단계로 나머지 부분을 읽는다. 궁금하지 않으면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중간 중간 쉬면서 읽는다. 나는 2시간 정도 글을 읽으면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일정 시간 책을 보면 잠깐 쉬었다가 다시 본다. 그게 효율적이다. ▲읽다가 생각한다. 죽 읽어 가면 머릿속에 안 남는다. 도중에 지금까지 읽은 내용이 뭐였는지 복기해봐야 한다. 글로 적어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더 좋다. ▲책 한 권을 읽으면 내 책에 쓸 수 있는 새로운 생각 몇 개는 반드시 건지려고 한다. 그런 조바심으로 읽는다. 하나도 얻지 못하는 책도 있다. 들인 시간이 아깝고 분해서, 생각이 날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러면 하나는 생각난다. 책을 읽으면서 다음에 읽을 책을 찾는다.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음에 읽을 책이 잡힌다. 읽고 있는 책에서 소개하는 책이 읽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책을 읽다보면 새롭게 알고 싶은 게 생기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책을 찾아 읽게 된다. 이렇게 책을 새끼 쳐 가며 읽는다. 그러다 보면 내가 읽은 책의 공통분모를 찾게 된다. 여러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 그것이 내가 쓰고자 하는 내용의 정수, 고갱이였다. 이치를 터득한 것처럼, 내가 쓰고자 하는 내용이 분명해지고, 그 분야에 정통해진다. ▲아는 것은 빨리 건너뛰고, 모르는 것에 시간을 쓴다. 그래야 읽는 의미가 있다. 아는 것은 아니까 재미있게 빠져 읽고, 모르는 것은 모르니까 빨리 건너뛰면 얻는 게 없다. ▲냉정하게 읽는다. 내가 아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을 배제하고, 알량한 배경지식으로 속단하지 않고 읽는다. 내가 썼다면 어떻게 썼을까. 내 생각과 비교하며 읽는다. 까칠하게 시비 걸면서 비판적으로 읽는다. ▲뜻이 아리송한 단어나 개념은 일단 전후 맥락으로 이해하면서 읽고, 나중에 반드시 정확한 의미를 찾아본다. 글을 읽는 것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이고,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어의 뜻과 개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의미를 파악하는 수준에서만 단어의 뜻과 개념에 관심을 가질 뿐, 어휘와 개념 자체를 파악하는 데에는 소홀하다. 글을 읽으면서 국어사전을 찾아보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독서할 때 국어사전과 백과사전을 수시로 찾아보자. 한두 번 찾아봐서는 그 어휘나 개념이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 적어도 세 번 이상 찾아봐야 자기 것이 된다. 어렴풋이 안다고 넘어가지 말자.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뜻과 개념을 알기 위해 사전을 찾아보면 의외의 소득을 얻는 경우가 많다. 몰랐던 뜻과 지식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재미있는 일이 된다. 해보시라. 인간은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을 좋아한다. 새로운 뜻과 개념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재미있는 놀이다. ▲문단을 요약하며 읽는다. 문단 하나를 읽으면 ‘A는 B다’로 정리하는 한 문장을 만든다. 핵심문장 혹은 주제문장이라고 하는 이 문장이 문단 안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없다. 여러 문장을 버무려서 내가 만들어야 한다. A는 찾기 쉽다. B가 글쓴이의 주장이고 관점이다. ▲글의 구조를 파악하며 읽는다. 글쓴이가 개요를 어떻게 짜고 썼는지 보는 것이다. 글의 시작은 어떻게 했고, 전개는 정의, 비교, 대조, 분류, 구분, 분석, 종합, 비유, 가정, 유추, 입증, 예시, 강조, 일화, 인용, 요약, 해석, 묘사, 서사, 설명, 대화, 열거, 과정, 반론 등 어떤 방식을 썼으며, 글의 마무리는 무엇으로 했는지 분석해본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소년동아일보》가 배달됐다. 내 기억으로 주간이나 주 2회 정도 발행했던 듯싶다. 신문이 나오는 날이면 학교에 일찍 나와 우편함으로 달려갔다. 연재소설 〈셜록 홈즈〉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찌나 재밌던지 상상과 추리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언제부턴가 신문 부음과 인터뷰, 인물 소개를 즐겨봤다. 신문의 인물 동정 란에 빠져들어 여러 사람이 사는 모습을 엿봤다. 그러다 보니 사건사고 박스 기사에 눈길이 갔다. 그곳에 이야기가 있었다. 생생한 스토리텔링이 있었다. 정색을 하고 정자세로 읽는 것만 독서는 아닌 듯하다. 글쓰기에는 오히려 이런 잡독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흥미 있는 것을 찾아 꾸준히 읽으면 된다.

나는 요즘 책을 쓰기 위해 책을 읽는다. “책 백 권을 읽는 것보다 한 권 쓰는 게 낫다. 그리고 책 한 권을 쓰려면 백 권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믿는다. 주로 내가 쓸 책과 관련 있는 책을 골라 읽는다. 이런 목적과 목표를 가진 후부터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책 읽기가 즐겁다. 그리고 읽은 내용은 강연을 통해 써먹는다. 그런 때 우쭐함을 느낀다. 그것을 느끼기 위해 또 읽는다. 그러면서 독서량이 늘었다. 그럼에도 아직 독서량이 많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내겐 희망이다. 독서량이 많은데도 지금처럼 글쓰기가 힘들면 얼마나 암담하겠는가. 지금부터 읽으면 된다. 읽는 만큼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좋아질 일만 남았다. 전도가 양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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