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레일 기고문 “무턱대고 읽는다고 잘쓸까”

무턱대고 읽는다고 글을 잘 쓸까?
강원국 (글쓰기 작가)

여름이다. 그것도 휴가철이다. 여름은 독서의 계절이다. 책은 7, 8월에 가장 많이 팔린다. 가을은 천고마비, 살찌는 계절일 뿐이다.

책을 왜 읽는가. 나는 잘 쓰기 위해 읽는다고 답한다. 남의 글에 놀아나기(?) 위해 읽는 것 아니다. 내가 왜 남의 글의 대상에 머물러야 하는가. 글을 쓰는 주체로 서야하지 않겠는가. 읽기는 있는 것을 소비하는 행위다. 쓰기는 없는 것을 생산하는 창조다. 하지만 쓰기 위해서는 읽어야 한다.

송나라 구양수 선생은 ‘다독’이 잘 쓰는 첫 번째 요건이라고 했다. 이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무턱대고 읽는다고 잘 쓸 수 있을까. 내 경험으로 글쓰기에 도움 되는 몇 가지 독서법을 소개한다.

먼저, 고전 읽기다. 마크 트웨인은 고전을 ‘누구나 한 번쯤 읽기를 바라지만, 사실은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는 책’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렇다. 평소 이런 책을 읽지 않았다. 어렵고 딱딱하고 재미없어서 안 읽었다. 과연 나만 그럴까. 고전을 읽으면 고전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들에겐 전공이나 영어 공부는 안 해도 좋으니 동서양 고전 100권 읽기에 도전해보라고 했다. 실행에 옮길 것이라고 기대하고 한 소리는 아니다. 책을 읽으라는 자극을 주기 위해서다.

실제로 우리나라 국민 중에 고전 100권을 읽은 사람이 0.01%나 될까? 미국은 1920년대 컬럼비아대학에서 고전 읽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대학 3, 4학년 2년 동안 고전만 읽는 과정을 개설했다. 지금은 세인트존대학을 비롯해 많은 대학이 학부 4년 동안 고전 100권을 읽는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EBS 프로그램 내용이다. 내 기억으로 우리나라도 어렴풋이 그런 시도를 했다. 초등학교 다닐 적에 ‘고전읽기반’이라는 게 있었다. 선생님이 공부깨나 하는 친구들을 모아 구성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같은 책을 열심히 읽었다. 다른 학교와 경쟁해야 했기 때문이다. 교육청 주관으로 시험도 봤다. 미국이 토론 중심으로 고전 읽기를 한 데 반해, 우리는 외워서 시험을 봤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있었다. 공부를 잘했다는 얘기다.

고전을 소개하는 칼럼을 쓸 일이 있어 읽은 적이 있다. 읽은 책이 열권도 되지 않지만 읽고 느낀 게 있다. ‘역시 고전은 고전이구나.’ ‘왜 고전, 고전하는 구나.’ ‘글 쓰는 데 도움이 많이 되겠구나.’ 하는 점이다. 첫째, 생각나게 하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오래된 책이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주는 시사가 있다. 쓸거리를 생각나게 한다. 둘째, 응용할 수 있는 원리가 담겨 있다. 다른 책에 나온 걸 가져다 쓰면 표절이 되지만, 원리를 갖고 응용해서 글을 쓰면 시비 걸 사람이 없다. 셋째, 누구나 인정하고 널리 회자되는 명문이 있다. 인용을 하더라도 고전에서 하면 폼이 난다. 어렵더라도 고전 세 권만 읽어보길 권한다. 많이 읽으면 좋겠지만 세 권만 정독해도 서른 권 읽은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고전의 프랙탈을 확인할 수 있다. 글쓰기가 달라질 수 있다.

특정 작가가 쓴 작품을 모두 읽는, 이른바 전작주의 독서도 좋은 방법이다. ‘전작주의’는 헌책 수집가 조희봉 씨가 만든 개념이다. 어느 작가를 좋아해서 처음부터 작정하고 읽을 수도 있지만, 한두 권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 그 작가의 작품을 모두 읽게 된다. 여러 작가가 쓴 삼국지를 모조리 읽는 사람도 있다. 일종의 오타쿠가 되는 것이다. 만화는 대부분 이렇게 읽는다. 영화도 그렇게 보는 경우가 많다. 이를 확장하면 ‘테마주의’가 생길 수도 있다. 특정 테마나 주제에 관한 책을 모두 읽는 것이다. 습관이면 습관, 몰입이면 몰입, 요리, 등산, 여행 등에 관한 책을 찾아서 다 읽는 것이다. 처음 읽은 책에서 소개한 책을 따라가는 방법도 있고, 참고문헌에 나와 있는 책을 읽는 방법도 있다.

전작주의 독서는 얻는 게 많다. 어떤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신작에 이르기까지 모두 섭렵하게 되면 그 작가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마치 중·고교 다닐 적, 문제집 여러 권을 풀었을 때 그 과목 전체가 한 장의 그림으로 다가오는 경험이다. 그래서 문학비평가 중에는 작가보다 그 작가를 더 잘 아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렇게 한 사람을 제대로 알면, 그 사람을 통해 알게 된 이치로 다른 작품까지도 관통할 수 있게 된다. 소설가 한 사람에 정통하면 소설 세계 전체가 이해되는 것처럼 말이다.

전작주의는 글쓰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칼럼리스트 글을 모을 수 있는 데까지 수집해서 모두 읽어보는 것이다. 그리하면 그 사람같이 쓰게 될 확률이 높다. 전작주의의 대상이 되는 건 글 쓰는 사람에겐 꿈같은 일이다. 내 책을, 내 글을 누군가 모두 읽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전작주의는 글 쓰는 사람, 읽는 사람 모두에게 의미 있는 접근법이다. 하지만 조심할 것도 있다. 군대 있을 때 이문열에 심취해서 그것이 소설의 전부인 줄 잘못 안 적이 있다. 전작주의의 함정이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소년동아일보》가 배달됐다. 내 기억으로 주간이나 주 2회 정도 발행했던 듯싶다. 신문이 나오는 날이면 학교에 일찍 나와 우편함으로 달려갔다. 연재소설 〈셜록 홈즈〉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찌나 재밌던지 상상과 추리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언제부턴가 신문 부음과 인터뷰, 인물 소개를 즐겨봤다. 신문의 인물 동정 란에 빠져들어 여러 사람이 사는 모습을 엿봤다. 그러다 보니 사건사고 박스 기사에 눈길이 갔다. 그곳에 이야기가 있었다. 생생한 스토리텔링이 있었다. 정색을 하고 정자세로 읽는 것만 독서는 아닌 듯하다. 글쓰기에는 오히려 이런 잡독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흥미 있는 것을 찾아 꾸준히 읽으면 된다. 나는 독서량이 많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내겐 희망이다. 독서량이 많은데도 지금처럼 글쓰기가 힘들면 얼마나 암담하겠는가. 지금부터 읽으면 된다. 읽는 만큼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좋아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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