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연재3 <편의점 남자를 보고 왜 눈물이 핑 돌았을까>

마음이 사람을 향하면 공감, 사물을 향하면 호기심, 사건을 향하면 문제의식, 미래를 향하면 통찰, 나를 향하면 성찰이 된다. 이 모두가 글감이 나오는 통로다.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단연 공감이다. ‘사람’이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할 얘기가 있는데 퇴근 후에 술 한잔할까?”
동료의 제안에 반응은 두 갈래다.
“나 바빠. 내일 아침까지 작성해야 할 보고서가 있어”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어떤 동료는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일 있어? 내일까지 보고해야 할 일이 있긴 한데, 맥주 한 잔만 할까?”

이렇게 따라 나간 사람이 맥주 한 잔만 하고 돌아온 경우를 나는 못 봤다. 이런 사람일수록 동료 얘기에 빠져든다. ‘이 친구 마음고생이 심하겠는데?’ 그러면서 “내가 살 테니까 2차 가자”고 손을 끈다. 그럼으로써 다음 날 상사의 불호령을 예약한다.

누구나 공감 능력을 타고난다. 갓난아기는 엄마가 울면 따라 운다. 무거운 짐을 양손에 든 어른이 발로 문을 열려고 애쓰면 5세 전후만 돼도 예외 없이 문을 열어준다. 초등학교 다닐 적 짝꿍이 책상 모서리에 발을 찧거나 연필 깎다 손을 베면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한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가슴이 쩌릿쩌릿하다. 그게 사람이다. 이 모두 신이 인간의 뇌에 장착해놓은 거울신경세포, 즉 공감 장치의 작동이다. 맹자는 이를 측은지심이라 칭하면서 인간의 본심이라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천부적 능력은 나이를 먹으면서 쇠퇴한다. 특히 힘 있는 자리에 갈수록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연구진은 직장에서 승진할수록 부하 직원의 말과 글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는 <승자의 뇌>를 쓴 이안 로버트슨(Ian Robertson)에게서도 확인된다. 권력을 차지한 사람은 남녀 불문하고 테스토스테론이란 남성호르몬 수치가 현저하게 올라갈 뿐만 아니라, 권력의 맛을 본 뇌는 도파민 증가로 인해 마약 중독과 같은 현상을 보이면서 점점 더 큰 권력을 탐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투운동 역시 여성이라는 약자의 처지와 심정에 둔감한 사람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다.

공감 수준이 글의 수준을 결정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공감 능력이 약할수록 유리하다. 공감력이 부족하면 남의 이야기를 듣거나 타인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자기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다.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린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시간을 쓴다.

또한, 공감력이 없는 사람은 조직의 정당하지 않은 요구로 인해 피해받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거나 배려하지 않는다. 어떡하든 지시를 이행하고 주어진 목표를 달성한다. 물불 가리지 않고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승승장구한다. 이럴수록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을 보면 “저 친구는 사람만 좋아서 걱정이야.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친구가 오지랖만 넓어”라고 비아냥댄다. 타인의 애환에 무뎌지는 것이 곧 스스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글 쓰는 사람이 흔히 범하는 잘못 중 하나는 자신에게만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점이다. 내 지식과 글솜씨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의 절반이라도 대상에 할애해야 한다. 대상은 사람일 수도, 사물일 수도, 상황이나 문제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그것을 모른다고 전제하는 게 좋다. 그것이 우선이다. 그래야 어림짐작과 설익은 추론, 성급한 결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호기심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관찰, 질문, 학습, 조사를 통해 대상을 파악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대상에 푹 빠져야 한다. 관심을 넘어 사랑해야 한다. 무언가를 사랑하면 늘 그것만 생각하게 된다.

가수 이선희의 노래 가사처럼 사랑하면 모든 게 궁금해진다. 그리고 질문한다. ‘왜 그렇지?’ 꿈에서도 나타난다. 이렇게 대상에 빠져들면, 그것의 원리, 패턴, 배경, 맥락, 본질을 꿰뚫게 된다. ‘아, 이거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이 온다. 대상에 완벽하게 공감한 상태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송강호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다. “배우로서의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극 중 인물을 얼마나 진심으로 대하느냐에 달렸다.” 극 중 인물에 빠졌다는 뜻일 게다.

나는 공감 수준이 글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글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고, 아픈 사람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으며, 불의 앞에서 분노하고, 불합리, 부조리를 보면 개선하고 싶은 욕구가 끓어오를 때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손님이 없는, 썰렁한 식당에 갔다고 해보자. 반응은 여럿이다. ‘손님이 없으니 한가하고 좋네.’, ‘내가 식당 했으면 어쩔 뻔했어. 다행이다.’, ‘식당 주인이 참 안 됐다. 어쩌면 좋냐. 쯧쯧’, ‘이대로 놔두면 안 되겠다. 정부 대책이 필요하겠어.’ 이처럼 네 가지 반응 가운데 누가 더 좋은 글을 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글감이 떠오르지 않는다. 세 번째는 자영업자의 애환을 쓴다. 마지막 네 번째는 대책을 요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글을 쓴다.

보수라면 진보는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해봐야

내 기준으로 공감 능력을 분류하면 세 종류다. 먼저, 감정 이입하는 정서적 공감 능력이다. 이런 사람은 남의 마음과 심정을 잘 헤아린다. 다음으로는 역지사지하는 이성적 공감 능력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거나 남의 처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이 들어 정서적 공감 능력이 떨어지면 ‘사이코패스’가 되고, 이성적 공감, 즉 역지사지하지 못하면 ‘꼰대’ 소리를 듣는다.

끝으로, 사회적 공감 능력도 필요하다. 뇌신경학자 매튜 리버먼(Matthew D. Lieberman)은 <사회적 뇌, 인류 성공의 비밀>에서 우리 뇌는 아무 일을 하지 않을 때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틈만 나면 사회에 관심을 갖도록 설계돼 있다고 주장한다. 불의에 분노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정의감 같은 게 있는 것이다. 사회적 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의 글은 특징이 있다. 첫째, 쓰려는 대상에 눈높이를 맞춘다. 어린아이이면 무릎을 꿇고, 장애가 있으면 어깨를 걸어 부축한다. 뿐만 아니라 대상과 함께 느낀다. 기쁜 일을 찾아 같이 기뻐해 주고, 힘들어하는 일에 함께 힘들어한다. 감탄, 환호, 비탄, 위무, 격려, 칭찬, 감사가 풍성하다.

둘째, 내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일방적 주장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결코 움직이지 못한다. 스스로 만족할 뿐이다. ‘내가 이 정도 얘기했으면 알아들었겠지.’ 결과는 그렇지 않다. 움직이려는 의도를 보이는 순간, 독자는 한층 더 결사 항전의 투지를 불태운다. 내가 보수이면 진보는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해봐야 한다. 내가 명분론자라면 실리론자의 관점을, 내가 찬성이면 반대 입장을 생각해본 후, 그것도 이런 면에서는 일리가 있다고 인정해줘야 한다. 적어도 내가 당신의 심정과 입장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객관성과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다.

셋째, 대상이 처한 상황과 기대하는 바가 파악됐으면 그가 되어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스스로 연탄재가 되어 보고, 꽃이 돼 보는 것이다. 만약 내가 새라면, 내가 물이라면 생각해보는 것이다. 시인은 그렇게 시를 쓴다.

주변과 타인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면 공감 능력은 어떻게 키울까. 독서가 지름길이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와 작중 인물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바라보게 된다. 독서할수록 타인에 대한 배려가 생기고,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줄어든다. 누군가가 돼서 그 누구의 눈으로 생각하고 바라보게 된다. 칼럼을 읽으면 칼럼니스트의 눈으로 그가 보는 방향을 본다. 꽃에 관한 시를 읽으면 시인이 되어 꽃을 바라본다. 소설을 읽으면 작중 인물이 된다. 대학 시절 이병주 선생의 소설 <지리산>을 읽고 주인공 박태영과 나를 동일시해서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헤맨 기억이 있다. 마치 미니시리즈 주인공이 촬영을 마치고도 극 중 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독서와 함께 필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세상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다. 나태주 시인이 <풀꽃>에서 말한 것처럼 가까이 가야 보인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가까이 보면 아름답다. 사랑하게 된다. 들여다보면 그곳에 어마어마한 우주가 있다. 이를 위해 나를 중심에 두고 세상을 보지 않아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말한 ‘탈중심화(decentering)’가 필요하다. 나만 보지 않고, 중심만 좇지 말고 주변과 타인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공감 능력 없이 50년을 살았다. 앞만 보고 달렸다. 아내가 명절에 손톱 조각만 한 열대어 구피 어항을 싸 들고 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구피에게 밥 한번 줘본 적이 없다. 그러던 내가 쉰 넘어 출판사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출근 첫날 자기소개를 하라고 한다. 사장 빼고 전원이 여성인 직원들 앞에 서서 살아온 과정과 포부를 얘기했다. 자기소개가 끝나자 가장 고참인 듯한 분이 잠깐 보자고 한다. 나는 왠지 옥상으로 불려 나가는 기분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에 서 있던 그녀가 한마디 했다. “앞으로 그렇게 길게 말하지 마세요.”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가니 직원들 눈빛이 하나같이 살벌하다.

나이 쉰이 넘어 이게 무슨 일인가. 아내와 아들이 이 장면을 보기나 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갈증이 났다. 터덕터덕 계단을 내려와 사무실 1층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서려는 순간, 50대 중반의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정장 차림의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보름달 빵과 딸기우유를 꾸역꾸역 목구멍에 밀어 넣고 있었다. 오전 11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그에게 보름달은 아침일까 점심일까.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필자 강원국은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역임했으며 2014년 <대통령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를 출간한 이후 글쓰기 관련 강연과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강원국의 글쓰기’는 3월 26일부터 매주 월·수·금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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