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 사보 기고

라면 살인미수 사건
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초등학교 시절 전주에 살았던 나는 형을 따라 큰아버님 댁에 자주 갔다. 제법 먼 거리였는데 빨리 걷자고 형을 재촉하며 한달음에 달렸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큰집에 갈 때마다 큰어머님이 라면을 끓여주셨기 때문이다. 라면 맛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맛이었다. 그 희귀한 음식을 큰집에 가야만 맛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가출했다. 친구와 단 둘이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했다. 친구는 아는 형네 집에 가고 나는 서울역에서 잤다. 자고 있는데 물청소를 한다고 나가라 해서 쫓겨났다. 비가 와서 지하도로 내려갔다. 노숙자들 틈에 쭈그려 앉아 자고 있는데 누군가 발로 툭툭 차면서 담배 가진 것 있으면 내놓으라고 한다. 없다고 했더니 대뜸 걷어찬다. 너무 무서워 다시 올라와 서울역 처마 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나이 쉰 살쯤 돼 보이는 아저씨가 재워주겠다고 같이 가자해서 따라나섰다. 남대문경찰서 뒤 사창가로 데려가는 것 아닌가. 그는 분명 새벽 열차를 타기위해 거기 있다고 했는데, 그곳 아주머니들과 친한 것이다. 자는 척하며 도망 갈 기회를 엿봤다. 아저씨가 잠에 든 것 같아 탈출하려는 순간, 신발이 없었다. 나는 맨발로 내달렸다. 그렇게 지옥 같은 밤을 보내고 아침에 친구를 만났다. 그때 친구가 사준 아침이 라면이었다. 일상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와 함께, 그 익숙한 맛이 어찌나 고맙던지.

라면 사랑은 군에 갔을 때도 이어졌다. 1983년 훈련소 시절 토요일 아침은 라면이었다. 당시 훈련은 힘들고 고단했다. 구타도 심했다. 토요일 아침 라면 먹고 전우신문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비가 오는 토요일이었다. 그날따라 ‘식사 끝’이 빨랐다. 뒤이어 ‘입안의 오물 제거’란 조교의 호령이 있었다. 뜨거운 음식을 빨리 먹지 못하는 나는 아직 라면이 남아 있었다. 일단 일어섰다. 잔반 버리는 곳에 가서 먹을 심산이었다. 그곳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교의 눈을 피해 젓가락질을 하려는 순간 옆구리를 걷어차였다. 이후 두세 차례 더 맞았다. 비 오는 날 개 패듯 맞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몸으로 실감했다. 식사 끝이라고 했는데 잔반 처리장에서 남은 라면을 먹은 게 죄였다.

훈련소를 마치고 전경으로 차출됐다. 당시 학생시위가 극심하던 때였다. 우리 부대는 연세대학교 담당이었다. 당시 연세대는 데모의 본산이었다. 낮에 최루탄을 마시며 데모를 진압하고 내무반에 돌아오면 몸은 파김치가 됐다. 내무반에서 기수가 높은 고참 서넛은 취침 소등 후에 당직사관의 눈을 피해 라면을 끓여 먹었다. 목에 남아 있는 최루액을 씻어내기에는 칼칼한 라면 국물이 최고였다. 물론 그들은 먹기만 했다. 나는 사역을 자청했다. 혹시라도 국물 맛이라도 볼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내무반에서 전열 기구를 사용해선 안 되었으므로 위험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라면이 간절했다. 라면을 끓이다 들키면 외박 금지 징계 정도는 불사해야 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라면을 끓여 갖다 바쳤다. 설거지를 명분으로 잠자리에 들지 않고 컴컴한 내무반 한쪽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고참이 부른다. “야, 강 일경 이리 와봐”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구나. 나도 한 젓가락 할 수 있겠구나 싶어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런데 아뿔사! 머리를 바닥에 박으란다. 원산폭격이란 얼차려다. “대가리 박고 앞으로 전진! 넌 살인미수야. 네가 스프봉지 쪼가리를 라면에 넣어 나를 죽이려고 했어. 목에 걸려 죽을 뻔 했단 말이야.” 캄캄한 내무반에서 라면을 끓이다 보니 일어난 살인미수(?) 사건이었다.

나이를 먹어 쉰이 넘었다. 정기 건강검진에서 위암 같다며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으라고 한다. 집에 돌아왔는데 왜 주책없이 배는 고플까. 먹을 게 없나 냉장고를 뒤졌지만, 찾아낸 것은 라면뿐이었다. 파며 고추며 이것저것 넣고 끓였다. 맛있게 먹으려고 젓가락을 드는 순간, 라면 김으로 앞이 뿌옇다. 아니 내 눈물 때문이었다. 라면을 끓여놓고 못 먹은 건 군대 살인미수 사건 이후 두 번째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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